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소련 국경분쟁 (문단 편집) === 미중접촉과 중소의 계속된 대립 === 중국은 이 분쟁의 결과로 전바오 섬과 그 주변을 점령했으나 굉장히 충격[* [[https://en.wikipedia.org/wiki/Sino-Soviet_border_conflict]] 이는 소련군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약한 탓도 있었다. 소련은 본격적인 갈등이 벌어지기 전에도 군대가 허약해서 두 번이나 충돌을 피했다고 한다. 외형적으로 중국에 비해 매우 강력했던 소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핵을 제외한 재래식 군대로는 중국을 막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온라인 상에서는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거나 소련이 중국 영토를 점령한 것처럼 설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규모 교전에 중국에 의한 소련 영토 점령이었다. 그래서 분쟁 이후 압도적으로 소련에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영토는 일부분이나마 중국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중국과 비슷하게 [[북방 영토]] 반환 문제가 있는 일본에서는 심지어 군사력 동원을 원하기도 했던 오오무라 다이지로(大村大次郞) 같은 인물들이 이 분쟁을 두고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다소 강제로 반환받은 중국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1969년의 위기는 소련이 중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중국 역시 소련의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점령해서 당시에도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맺은 조약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 미국'과 '[[흐루시초프|수정주의]] 소련'의 두 적대적인 초강대국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고립을 인정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내밀던 유화의 손길을 잡게 되었다. 중국의 생각에 의하면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 1971년, 미국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졌고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과학 기술, 문화예술, 무역 등 다방면에서 협력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인 1979년에는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까지 일어나자,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로 인도와 대립하던 중국은 파키스탄과 동맹관계를 맺고, 인도는 중국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소련과 손을 잡는다. 인도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기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한다. 이로써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vs 소련 + 인도[* 여기에 통일한 베트남도 친중이었다가 친소련으로 돌변하였다.]라는 거대한 대립관계가 나타났다. 여기에 1979년에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의 소련 무기 복제판을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게릴라에 건넸다. 소련은 소련대로 불쾌감을 느꼈다. 일단 소련의 전술, 전략적 우위가 확보되었고 고질적이었던 중소국경의 불안정한 상태는 해소되었으나 브레즈네프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서유럽을 향한 유화정책이 강화되었고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선으로 1969년 9월 서독 총리로 당선된 [[빌리 브란트]]와 회담, 1970년 8월 12일, 서독-소련 불가침 협정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서독이 폴란드의 프로이센 영토를 포기하게 하였다. 1971년 9월, 서방도 서베를린이 서독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나섰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SALT 협정, ABM 조약이 체결되는 등 한동안 순풍이 불었으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틀어졌고 브레즈네프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빌리 브란트가 [[귄터 기욤 사건]]과 성추문으로 사임함에 따라 난황에 부닥쳤다. 결국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소 관계는 끝내 틀어지고 데탕트는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